수필

곡우 (穀雨)

나의 오우아 2022. 4. 2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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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을 다니다 말고 혼자 뭘 해보려고 할 때에 친구랑 같이 어머니와 누님이 하시던 텃밭을 가꿔 보기로 하던 시절이었다.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다. 그 이전에 어머님과 누님이 아버지께서 하시던 텃밭을 돌아가신 후 두 분이 하시게 되었다. 간혹 휴일 때나 해외 근무 시절 휴가 때 텃밭을 도와 드리곤 하여 그렇게 낯설게 느껴 지지가 않았다. 곡우가 오기 전 이랑을 내고 흙을 뒤집어 놓고 해야 된다. 그래야 곡우 때 씨를 뿌려 여름에 수확의 맛을 느낄 수가 있다. 땅의 냄새가 옛날 어린 시절 쇠똥이 널브러진 거리처럼 실제로 구수하지도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즉 땅을 일구고 하는 일들로 구수하게 느껴 지는 것은 어느덧 나도 나이가 그렇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리라. 부지런히 주말마다 와서 장대를 세우고 잡초도 뽑고 물도 주고 했다. 그러고 나면 나무 아래 그늘진 평상에 앉아 가져온 안주에다 막걸리를 부어 놓고 땀을 훔쳐 낭만을 그리워 하고 있을 때 옛 어린 초등학교 4학년 때가 아련히 기억이 난다.

 

옛날 초등 시절 우리 집은 농사를 짓지 않아서 사실 난 농사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주변 동네에 논농사며, 하우스 농사며, 밭농사 등 많이 했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자랐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모종을 심는다고 일손을 도와 드렸고 어떤 날엔 어린 송아지 코를 뚫어 뚜레를 달던 일이며 여러 가지를 보고 자랐다. 하루는 짝이 내게 와서 집에 놀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집 뒷편에 그렇게 넓지는 않았지만 그때 그 시절엔 엄청 넓은 운동장 같았다. 그때도 곡우였던 것 같았다. 짝의 아버지, 어머님이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있었다. 무엇을 심었던 것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고추를 심었던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그런데 거의 다 심어 갈 즈음 이었는지 아버님의 큰 소리로

얘 경원아 너 가게에 가서 막걸리나 좀 받아 오너라

아니 술 심부름을 그것도 친구가 놀러 왔는데 애한테 시켜요

하면서 어머니가 퇴박을 놓으며

제가 갖다 드려야죠. 안 그래도 안주도 가져올 겸 가려고 했던 참이래요

라면서 어머님이 휑하니 가시었다. 막걸리가 도착하자 마자 아버지는 저를 부르시며

니 이름은 뭐꼬

. 제 이름은 정헌 방 정헌입니다.”

그래 우리 집엔 와왔노. 그것도 계집애 집에

네 경원이가 같이 숙제 하자고 해서 왔는데예

그래.. 숙제 열심히 하고 가거래이. 글고 니도 고추 달린 남잔데 막걸리 한 사발 할래

하면서 잔을 건네 주었다. 난 짝이 보는 데서 거절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어물쩡 어물쩡 거리고 있을때

사내 녀석이 와 눈치는 보노. 언능 받거래이

하면서 또 건네 주던 사발을 이젠 거절하지 못했다.

네 그럼 조금만 주십시요

라고 냅따 나도 어떤 용기가 났는지 받아 들었다. 아버지는

가만히 있거래이 아직 4학년이니까 이만큼만 뭇거래이

하면서 절반의 절반 정도만 부어 주셨다. 난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걸 보더니

야아 이노마가 지도 남자라꼬 단박에 마시네. 자 고추에 쌈장이 최고다. 이렇게 무라

라고 듬뿍 찍은 쌈장에 찍은 고추를 주셨다. 난 그때 고추도 먹어 보지도 못한 시절이었다. 헌데 어떻게 거절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받아 먹었더니 옆에 계신 어머님께서

아니 이 양반이 술 취했소, 애한테 술을 먹이면 우짭니꺼. 미쳤구만 이 양반이

개안타 사내 녀석이. 그 정도는 무도

그렇게 난생처음 먹어 본 막걸리. 하지만 많은 양이 아니어서 그런지 취하지는 않았다. 별 이상도 없었고.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을려고 하는데 저녁 밥맛이 없고 잠이 와서 일찍 잤는데 밤새 종일 뒷간에 들락날락 했던 그런 시절이 떠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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